스우파와 윤대원
스트릿우먼파이터(이하 스우파)가 유난히 주목 받은 이유는 이중으로 타자화된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무대에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제도권 무용수가 아니라 ‘스트릿’댄서 출신인 동시에 여성이었다. 그들이 말하고 입고 추는 모습 속엔 기존의 컴피티션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었던 비제도권적 저항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편 중국을 뿌리에 두고 전통이 발목 잡고 있는 한국화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현재를 거부해야하는 동시대성과 만나기 쉽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특히 대학교육에서의) 한국화란 과거로 부터 그리고 동시대 현대미술로 부터 이중으로 타자화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윤대원’은 스트릿 댄서 출신이자 한국화를 전공했다. 그에게 스트릿 댄스란 나이 들며 자연스럽게 포기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젊은 몸’이었을 것이고, 서울시가 ‘메타버스의 도시’를 선언한 2021년 디지털 시점에 한국화 역시 자연스럽게 접어 마땅할 시대착오적 매체나 미학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치각의 개인전에는 20대 작가답게 디지털 그래픽 영상과 NFT 작품이 전시 되어 있다. Virtual Body Lab 시리즈 영상 속에는 작가 본인의 몸과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지만 스트릿 댄서의 몸은 지워지고 디지털 기호에 순응하는 몸이 부각되었으며, 그것은 만화경을 연상시키는 그래픽 동영상으로 발전되고 있다. ‘디지털 기호에 순응하는 몸’ 이라는 것은 분절 왜곡된 몸이 디지털 또는 가상 세계와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 조화보다는 부조화, 안정보다는 불안정, 시각적 쾌감보다는 충격이나 불쾌함, 편함 보다는 불편함, 정(positive)이 아니라 부정(negative) 의 동시대예술의 미학을 인해 한다면 칭찬이 될 수 없다. 윤대원의 전략(즉 아이디어) 인 ‘반복’은 앤디와홀 이래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며 ‘왜곡 또는 변형’ 은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더이상 낮설거나 새롭지 않은 것이 된지 오래다.
물론 반복, 왜곡, 변형의 전략은 여전히 동시대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특정 동시대예술가들의 그것은 당위적일 수 있고, 윤대원의 그것은 당위성을 의심받아야 하는 것일까. 앞서 윤대원의 전략을 ‘아이디어’라고 했다. 아이디어와 컨셉을 구지 구분한다면 아이디어는 컨셉을 하드캐리 한다. 첫째는 그의 아이디어가 ‘어떤 컨셉을 위해 채택되었을까’하는 질문을 하고 싶다. 둘째는 이런 아이디어들이 우리가 사는 (더이상 앤디와홀이나 초현실주의의 시대가 아닌)동시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질문할 수 밖에 없다. 이 둘은 이제 데뷔하는 젊은 작가에게 가혹한 질문 일런지 모르지만 만약 어느 다른 누구로도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라는 것이 예술가의 최고 미덕 임에 동의 한다면 앞으로 그가 준비해야할 대답이다. NFT 영상은 판매되었으나 구매자가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고 작가는 밝힌다. 금전적으로 보답 받은, 전시회의 단 하나뿐인 작품 NFT-BODY COIN 영상이 외려 흥미롭다. 이 작품은 작품 스스로가 가상 화폐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 구매자가 누군지도 모른다.
2. 가상화폐의 이미지가 팔렸는데 가상화폐로 지불되었다.
3. 작품을 판매했는데 여전히 전시가 가능하다. 라는 지점에서 말이다.
2. 가상화폐의 이미지가 팔렸는데 가상화폐로 지불되었다.
3. 작품을 판매했는데 여전히 전시가 가능하다. 라는 지점에서 말이다.
가장 상업적이지만 외려 이 시퀀스는 새로울 뿐더러 아이러니하다. 어떤 사람들에겐 이 상황이 ‘불편’ 하거나 ‘불안정’해 보이거나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계에 데뷔하는 20대 젊은 작가에게 이미 보편적 매체가 된 영상, 디지털, 가상 공간과 NFT가 동시대미술에 접근하는 마땅한 매체로 인식 되는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문제는 동시대예술에서 그것들이 ‘이미’ 보편화 되어 있다는 점일 테다.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매체들 속에서 이미 수많은 작가들이 소재로 다루어온 만화경과 만다라들 속에서 윤대원의 그것은 어떻게 만다라 속 정체 없는 수많은 형상들 중 하나로 사라지지 않고 윤대원의 것으로 남을 수 있을까. 윤대원 작가가 살고 있는 이태원의 변두리 버전인 평택의 한치각은 신진작가 공모 선정을 젊은 작가를 과감히 선택함으로서 그 질문을 작가 자신에게 던지고자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한치각이 위치한 평택 미공군기지 앞 시장통 골목은 서울 경기지역 전체에서 가장 동시대 예술과 거리가 먼 동네중 하나일 것 같다. 다시 말해 태반이 군인 또는 군인 관련 업종 종사자인 이 동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방문하여 한치각의 큐레이션을 교감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한편 미군기지를 기반으로 유흥가로 발전된 동일한 역사를 가진 윤대원의 이태원은 한치각 동네에 비해 현저히 문화예술적 감각이 높은 지역이다. 최고급 리움에서부터 아마도 공간과 현대카드 콘서트홀 등을 보유한 남한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은 아닐까. 그곳으로 부터 먼거리의 평택의 시장 골목길 구석에서 만난 윤대원 작가의 작품은 우리에게 이태원과 평택 만큼의 ‘거리두기’를 요구하고 있는듯 보인다.
‘이미’와 ‘아직’ 사이가 동시대성이라고 설파한 조르쥬 아감벤은 추가 설명한다. 동시대적 인간이란 ‘현재에 들러 붙는 동시에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태원은 스우파 처럼 타자화를 통해 저항성을 획득했다. 그것은 서울 한복판에서 가장 먼 거리의 미군문화 없이는 불가능했다. 스우파의 미학은 공중파 방송의 매끄러운 아이돌의 그것으로 부터 먼거리에 있는 지점이었기에 가능했다. 윤대원 작가에게도 가장 먼거리에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이는 거리의 몸(스트릿 댄스) 또는 전통회화의 어떤 것으로 부터 영상, 디지털, 가상 공간과 NFT 등으로 접합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묻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가 살고 있는 이태원 지역이 거리두기를 하여 남산에서 내려다 볼 때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지형과 위치가 잘 파악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