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우리가 자주 대하거나 겪어 잘 아는 상태라 믿었던 것들이 미끄러지는 때가 있다. 예술의 장은 때론 ‘당연’이라는 말을 의심과 두려움을 포괄한 질문으로 바꾸는 일은 한다. 특히 디지털 기술의 격동 안에서 물리와 비물리에 대한 감각은 쉽사리 미끄러지고, 혼종적 주체와 상황은 그들 스스로를 켜켜이 겹쳐 가며 두드러져 나타난다. 그리고 변화의 속도에 발맞춘 우리의 몸은 감각의 범위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단절시킨다. 또한 자기 존재를 향한 독립적 인식, 즉 자타공인, 개인을 규정하는 몸이라는 조건은 절대적 완결성을 뒤로하고 관계가 얽힌 존재로의 자기 증명적 의미 획득이 되어간다. 여기, 윤대원 개인전 《강강-술래-잡기》는 실제와 가상의 감각 판단을 유보한 채 몸을 겹치고 당연함을 질문으로 치환하며 우리를 환영이 가득한 예술의 장으로 초대한다. 그렇다. 그곳에는 환영이 가득했다. 켜켜이 쌓인 몸과 그림자, 스크린과 거울 속 환영(幻影)들, 그리고 그들의 접촉 사이에 흐르던 우리의 접속에 대한 환영(歡迎)이.*

  1.
  윤대원은 ‘접촉(contact)’과 ‘접속(connection)’이라는 신체·기술적 조건을 매개로, 오늘날 우리 몸을 둘러싼 감각과 인식의 조건을 재구성한다. 여기서 ‘접촉’과 ‘접속’은 단지 몸과 몸, 인간과 인간, 인간과 기계의 물리적·기술적 조건을 구분 짓는 개념을 넘어선다. 윤대원은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실제의 감각과 디지털 감각 상에서의 만남이 명징하게 분리되기보다 혼재하는 상태를 바라본다. 그가 펼친 낯선 세계에서 몸은 물리적 접촉과 비물리적 접속의 뒤섞임에 놓인다. 중앙에 우뚝 솟은 빔 프로젝터 타워는 회전하며 녹화된 몸을 빛으로 변환시켜 뿌리고, 그 주변을 둘러 팔괘의 형상을 본떠 배치된 투명한 천과 스크린, 거울들, 그리고 오방색의 불빛은 구조적 상징으로 자리를 지킨다. 우리는 작품이자 무대가 된 공간에 들어선다. 그리고 보류된 시간을 거쳐 4명의 퍼포머와 만난다. 퍼포머와 우리의 몸들은 끊임없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접촉하거나 접속할 대상을 탐색하고, 때론 접촉과 접속은 서로를 가능성으로 환유하거나 치환한다. 이때 몸들은 주체의 가장 근원적인 물리적 요소로 준비된다. 한편, 회전하는 빔 프로젝터의 방향에 따라 녹화된 몸들은 천과 스크린에 쌓여 물리적 몸과 우연적 접촉을 수행하고, 그림자는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며, 거울 속 몸은 분산되어 공간에 퍼져간다. 이렇게 그곳의 몸들은 감각하고 접촉하고 접속하길 반복한다.**
  접촉 없는 접촉의 상황, 접촉 즉흥, 눈과 빔 프로젝터의 응시, 발산하는 존재들의 열감, 접속 동기화되는 우리. 접속하고 끊어지길, 접촉하고 탈락되길 반복하는 퍼포머의 도전과 주도 앞에서 우리의 몸은 소유된 한정성을 이탈하여 세계를 향해 열려간다. 우리의 몸을 둘러싼 틀이 재구성되며 약간의 낯섦과 불편함이 돋아나기도 한다. 이는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의 발전과 동반한 불안과 고립의 문제로부터 야기된 것일 수도, 접촉에 익숙한 사회문화적 몸이 새로운 감각 장치의 확장에 맞춰 접속의 디지털 신체로 변환 인식되어 가는 상황으로부터 야기된 것일 수도, 물리적 환경에서 이탈하여 실제와 가상의 흐릿한 경계에 놓인 몸의 조건에 대한 난감함일 수도 있다. 몸을 단지 생물학적 차원의 프레임으로 한정하지 않는 윤대원의 초대 안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잡한 생각은 지속된다. 윤대원은 신체가 디지털 기술에 의해 분절되고, 비물질화되며, 접속 가능한 상태로 변형되는 것 자체를 오늘날의 감각 현실로 직시한다. 우리는 윤대원을 통해 몸이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 안에서의 상태, 즉 연결의 양태로 현존한다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열린 몸이 되어 잇따르는 다음 장면을 마주하고, 복잡한 상념은 잠시 접어둔 채, 개인주의적 소외의 극복과 공동체성의 회복 가능성을 더듬기 시작한다.

  2.
  윤대원 개인전 《강강-술래-잡기》의 중심에는 ‘놀이’가 있다. 이는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 우리 공동체의 오랜 놀이 두 가지, ‘강강술래’와 ‘술래잡기’의 접촉(접속)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윤대원이 마련한 움직임은 유년기의 감각적 기억을 호출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놀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가 몸의 움직임이라는 매체를 다루는 방식은 단순히 조형적 움직임의 미학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처럼 “춤은 근원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해방의 행위”이며, 그의 안에서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축되고 인지된 움직임의 제의적 의미 가능성이 확장된다. 그의 초기 작업이 몸에서 비롯된 기계적 움직임을 패턴화하고 이미지화함으로써 몸을 확장하고 소진시키는 것에 집중되었다면, 《강강-술래-잡기》는 제의적 몸짓과 공동의 감정을 발화시키는 움직임으로 초점을 옮겨가고, 몸의 정서적 리듬 동기화를 감각의 해방을 위한 제의적 수행으로 확장해 나간다.
  윤대원이 마련한 “낯설지만 최대한 친숙하게 접촉을 경험하고, 공동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강강술래와 술래잡기라는 형식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놀이의 틀 안에서 움직임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닌 즉흥성과 감응성에 의해 결정된다. 퍼포머와 우리의 움직임은 중첩되고 뒤섞이며, 술래잡기와 강강술래라는 놀이의 규칙을 통해 비물질적 이미지 속에서 재배치되고, 반복되는 공동의 정서적 태도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고사리 꺾기, 손치기 발치기, 기와 밝기, 문지기 놀이를 닮은 움직임은 단순한 신남이나 쾌의 표현을 넘어서, ‘혼자 놀기’의 반대편에서 누군가를 함께 부르고, 잡고, 닿고, 도망치며, 응시하는 관계를 구성하는 방식이 된다. 술래와 짝꿍이 바뀌고 놀이가 변화하며, 퍼포머를 따라나선 우리는 친구 손을 잡고 뛰어놀기 시작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적 움직임에서 접촉은 감각의 가장 원초적인 매체가 되며, 그 짧은 만남과 탈락은 새로운 접속의 열망을 남긴다. 결국 《강강-술래-잡기》가 펼친 한국 전통의 공동체적 세계관은 그렇게 거창하고 멀리 있는 곳이 아니었다. 윤대원을 통해 만난 우리의 공동체적 세계관은 친구들과 확실한 약속 없이 만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놀이를 하며, 땅거미가 내려앉을 즘까지 뛰놀고, 기약 없는 “내일 또 만나!”를 남긴 채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서던 유년의 세계관이다. 옳고 그른 것, 득실, 관계 따위를 낱낱이 헤아릴 필요 없이 뛰노는 우리는 처음 만난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해방에 놓인다. 그 해방 안에서, 빔 프로젝터의 움직임과 디지털 기술이 결합되어 구현된 실제와 가상의 리듬 중첩은 단지 감각적 배경이 되고, 시공간의 중심은 점차 주제적 상황에서 우리의 몸으로 이동한다.
  윤대원은 《강강-술래-잡기》를 통해 “디지털 문화가 신체를 흐트러뜨리고, 불안정한 감각을 유발한다”라는 문제의식을 드러내지만, 동시에 우리가 마주한 기술 매체의 상태를 자연스러운 감각 환경의 변화로 받아들이며 이에 따라 부유하는 질문들을 드러낸다. 그가 마련한 예술의 장은 우리의 몸을 고정된 실체가 아닌, 가변적이고 관계적인 상태로 제시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단지 뛰어놀고, 만남과 내일을 기약하고 희망한다. 그리고 초대된 우리는 놀이의 주인이, 그리고 이곳의 주인이 되어간다. 이렇게 윤대원의 장은 몸과 공동체에서 파생되는 복고적 목표를 넘어, 당대의 조건에서 몸을 새롭게 느끼고 함께하는 방식을 사유하는 감각 실험실이 된다. 그곳에는 비판보다는 성찰이, 회귀보다는 회복이 가득하다.

  3.
  윤대원 개인전 《강강-술래-잡기》는 7일간 19회의 퍼포먼스 공연과 1회의 아티스트 토크로 구성되었다. 본 프로젝트는 "다양한 장르와 매체가 결합된 다원예술의 특성을 통해 전통적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한 예술적 시도를 목표로 한다."는 작가의 설명에 따라 전시가 아닌 다원예술, 공연, 퍼포먼스의 이름을 붙여 칭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특기할 것은 공식적인 홍보물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여전히 ‘전시’로 호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일 저자성과 전시장 중심의 관람 방식이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개인전의 형식적 문법에 미묘한 어긋남을 유도하며, 흥미로운 긴장이 발생한다. 윤대원에게는 작가이자 다원 예술 프로젝트 기획자, 전시 관람 경험 설계자라는 복합적 역할이 부여된다. 특히 작가가 퍼포먼스의 구조를 통해 관람객의 감각적 몰입 조건을 설계하고, 우리의 몸과 태도를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위치시키는 방식은 본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전략이자 방법론으로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상용 기술은 그 인터페이스의 구성에 따라 기능의 서사와 감각의 구조를 전혀 다르게 만든다. 인터페이스란 단순한 조작 패널을 넘어서, 접속의 가능성을 여는 장치이자 접촉을 유지하게 하는 환경이다. 윤대원은 인터페이스의 개념을 예술의 방법론으로 전치시킨다. 다시 말해, 그는 기술과 감각의 접점 위에서 새로운 ‘지각의 인터페이스’를 제시한다. 그 인터페이스는 퍼포머의 몸을 통해 구체화되고, 관람객의 감각을 통해 완성된다. 물리적 신체만이 아니라, 감각하려는 의지, 몰입하고자 하는 태도, 공간에 녹아들고자 하는 상태, 이 모든 것이 인터페이스가 된다. 기술사적 정의에서 인터페이스는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기능적 매개이지만, 윤대원의 작업에서 인터페이스는 몸과 감각, 매체와 지각 사이의 긴장과 협업을 유도하는 장치이자 태도적 프레임이다. 그리하여 관람객은 이 퍼포먼스를 단순히 바라볼 수도, 참여할 수도, 응시하거나 몰입할 수도 있는 복수의 상태에 놓이며, 감각적 주파수를 조율하는 존재로 작동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참여형 예술을 넘어, 감각적 태도 자체의 전환을 요구하는 예술 구조다.
  입장이 시작되는 퍼포먼스 시작 전, 20분간의 보류된 시간은 이러한 태도의 예비 구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퍼포머의 신체가 등장하기 전, 중앙에 우뚝 솟은 빔 프로젝터, 팔괘의 형상으로 배치된 투명 천과 스크린, 거울, 오방색의 조명은 퍼포먼스가 펼쳐질 무대 이전, 작품의 위상으로 자리한다. 관람 대상으로서 물질성을 지닌 이 작품들은 장면의 전조이며, 지각의 예열이며, 접속 이전의 감각과 접촉 직전의 여백으로 작동한다. 윤대원의 작업은 여기서 단순한 미디어 퍼포먼스가 아닌, 감각 환경의 설계로 확장된다. 관람객은 잠재적 공동체로서의 감각 상태를 예비하며, 장면의 몰입으로 진입할 태도를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이 침묵의 시간은 이후 전개될 퍼포먼스의 구조적 리듬과 공간감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작동한다.
  시작된 퍼포먼스는 두 개의 장면, 즉 1부와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 퍼포머 네 명의 움직임은 천, 스크린, 거울에 투영된 이미지와 그림자 사이에서 분절된 채 펼쳐진다. 과잉된 시각 정보와 이질적인 시간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관람객은 단일한 시점에서의 지각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가며 장면 사이를 오가고, 흐름을 조정하며 감각의 좌표를 재구성한다. 감각은 여기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의식되고 조율되어야 하는 ‘노력’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정보량이 많고 공간적 여백이 큰 구조는 때때로 불안정한 몰입과 정체된 동선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2부로 이행하며 구조의 진의를 드러낸다. 2부는 관람객의 움직임이 무대로 편입되며, 앞선 여백과 정적이 감각적 준비의 조건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구간이 된다. 관람객은 더 이상 주변부의 타자가 아니라, 구조 속에 들어온 감각의 주체가 되며, 접촉과 탈락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몸이 어떻게 의미를 생성하는지를 체험한다. 강강술래와 술래잡기의 형식은 이 감각적 접속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관람객은 퍼포머의 손을 맞잡고 함께 뛰며, 누군가를 찾고 응시하고 도망치는 리듬 속에서 감각의 패턴을 재훈련한다.
  술래잡기에서 주체는 접촉을 통해 주객의 위치를 교환하며, 강강술래는 반복의 궤도를 통해 공동의 정서를 불러낸다. 퍼포먼스의 막바지에 이르면, 따로 또 같이 놀던 우리 모두는 손을 잡고 하나의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도전자이자 주도자였던 네 명의 퍼포머는 한 사람씩 조용히 무대를 빠져나간다.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누군가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제 공동체의 놀이는 관람객의 몸 위에서 자립적으로 지속된다. 이 장면은 단순한 놀이의 재현이 아니라, 기술 매체가 강조한 비물질적 상호작용을 신체적 정동으로 역전시키는 전략이 된다. 퍼포먼스는 그렇게 ‘공동체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를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태도 실험이 된다.
  이 실험은 협업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움직임 디자이너, 사운드 디자이너, 4인의 퍼포머는 단순한 협업자에 그치지 않고, 공연 이후에도 작가와 동일한 위치에서 아티스트 토크에 참여한다. 특히 사운드 디자이너는 가야금이 바람에 공명하며 발생시킨 비접촉적 사운드를 수집했고, 참여자들은 매번의 연습과 회의 이후, 공동작업 웹 페이지를 통해 각자의 감각과 진행을 공유했다. 이는 단순한 온라인 접속이 아닌, 접촉 없는 접촉, 태도의 동기화 구조로 기능하며, 퍼포먼스의 즉흥성과 반복성 안에서 매 회차를 유일한 감각적 사건으로 만든다. 윤대원은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은 제의의 구조 속에서, 다원예술이 생성하는 감각의 리듬을 탐색하며, 몸과 기술, 공동체와 태도 사이 새로운 연결의 방식을 발명하고자 한다. 윤대원이 설계한 감각의 구조는 관람이 끝나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것은 단지 작품의 잔상이나 기억이 아니라, 이후의 일상에서 몸을 어떻게 열어둘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렇게 예술은 이따금,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태도를 켜게 하고, 누군가를 향해 조용히 몸을 기울이게 만든다.

*윤지희 선생님이 작성한 전시 서문 도입부에서 사용된 중의적 단어 ‘환영’를 빌려 쓴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는 감각을 매순간 “세계의 재창조와 재구성”이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한다. 윤대원이 펼친 예술의 장은 신체가 가지고 있는 표현능력을 볼 수 있는 장이며, 그가 바라본 예술은 주체와 세계와의 만남, 그리고 만남을 넘어선 세계의 재창조와 재구성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윤대원의 전시를 통해 “예술적 표현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에 자체상의 존재를 부여하며, 이러한 자체상의 존재를 우리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사물로서 자연 안에 배열시킨다.”고 하는 퐁티의 말을 떠올린다. 윤대원의 예술적 표현은 당대의 신체·기술적 조건에서 파생된 인식과 존재의 조건을 접촉과 접속이라는 키워드로 치환하여 펼쳐 놓는데, 퐁티의 말과 같이 윤대원은 자신조차 포섭하여 우리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사물로서 자연 안에 ‘배열’한다. 이로써 우리는 주체와 세계와의 만남의 장이자 세계의 재창조와 재구성의 과정 안에 실존의 한 양상으로 스스로를 파악할 가능성에 위치하게 된다. 이남인,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파주: 한길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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