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앙
어릴 적, 나에게 종교 활동은 하기 싫은 숙제와 같은 것이었다. 때가 되면 즐거운 일을 포기한 채, 특정 장소에 장시간 머물러야 했고, 그 곳에서 나는 나의 상태와 관계없이 경건한 마음과 성스러운 태도를 갖춰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종교와 관련된 모든 규칙과 사항에 의심을 품었다. 신이 싫었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위급한 상황에 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무사히 해결해냈다. 사실은 꽤나 짧은 시간에 일어났던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었다. 다만 내가 그 일을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는, 사건이 해결된 순간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던 내 모습 때문이다. 나는 그 이후로 종교 활동을 그만두었다.
2. 의심
절대적 존재란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 세계는,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떻게 그를 신뢰할 수 있을까, 그를 향한 믿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내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관계·사건·환경 안에서 끊임없이 맴돌았고, 그것은 여러 갈래로 파생되어 나의 사고를 형성해 나갔다. 특히 개인의 주관, 정의, 신념, 가치관 등은 ‘믿음’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누군가를 파악함에 있어 그가 무엇을 믿는지,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얼마나 강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지 등 그 믿음의 근원지에 대해 따져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다만 나에게 문제가 되었는 것은, 그래서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믿는 것들을 의심했다. 의심을 통해 더 나은 방향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 바빴다. 믿음에 대한 거부감은 스스로를 알 수 없는 늪으로 빠져들게 만들 뿐이었다. 우울과 회의에 사무쳐 있던 나는 결국 전문가를 찾아갔고,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 깨달은 것은, 내가 의심할 수 없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좌절이 오랜 시간 나를 애워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신’과 ‘아버지’였다.
3. 질문
나는 더이상 전문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 관한 나의 감정을 파헤칠 작정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다시 한번 ‘신’을 쫓기 시작했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그저 내게 어떠한 믿음도 생기지 않는 이유와 다른 이들이 신을 믿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고, 이것이 분노를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가 쫓고자 했던 대상은 나와 연류된, 어릴 적에 직접 경험한 유일신과 성경에 국한되어 있었다. 성당은 굳이 다양한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천주교는 중앙집권 체제였기에, 어떤 곳을 가든, 같은 교리와 형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좀더 자주 찾아간 곳은 주변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었다. 나는 여러 종파들을 오가며 그들에게 믿음의 필요성과 이유, 그리고 신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피어난 것인지에 관해 질문했다. 목사와 신부 대부분은 그들의 교리와 신념을 설파했고, 그것은 역시, 나에게 불편함으로 가득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들은 더 불편했을 것이다. 계속해서 내가 절대자를 믿을 수 없는 이유와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조목조목 따져댔기 때문이다. 분노로 일관된 질문은 단순히 개인의 믿음과 성경의 내용 뿐만 아니라 종교 단체의 구조적 문제까지 건드릴 때도 많았다. 닿지 않는 희망을 쫓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명목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냐, 개인의 의지에 따라 믿음이 달라진다면 그는 진실로 절대자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절대자로 칭송할 뿐인 것 아니냐,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진리를 담은 경전이 아니지 않냐, … 돌이켜보면, 나는 그저 내 분노를 그들에게 쏘아댔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절실했다. 나는 분노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누구라도 나를 설득해서 믿음을 선사해주길 바랬다.
그렇게 반 년이 흘러갈 쯔음, 그러니까 반복되는 싸움과 그 결말에 지쳐갈 쯔음, 내게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 것은 거리에서 만난 아무개 X를 따라갔을 때였다. X는 내가 경험했던 신부와 목사와는 달리, 내 질문에 공감하며, 성경에 기반한 명쾌한 논리로 답을 내주기 시작했다. 그는 특정 종교의 믿음은 경전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내용이 ‘판타지’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믿음은 자연스럽게 형성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리고는 성경을 읽는 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나는 X의 이야기에 매료되었고, 내가 품고 있던 의심은 하나 둘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곧, X를 따라 그의 교회에 나갔다.
X의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게 수많은 답을 주었고,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들에게 믿음이 자리잡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신에 대한 각자의 경험와 이야기, 그리고 믿음에 대한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지점들 또한 존재했고, 그들이 제시하는 특수한 규칙에 또다시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곳에서 조차도 유별나게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이었고, 교리를 가르치던 몇몇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신에 대한 분노를 대놓고 표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에게 나의 모습은 ‘아직 다 배우지 않아서’, ‘아직 다 알지 못해서’, ‘아직 다 깨닫지 못해서’ 나타나는 어리광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교리에 더 집중했다. 매일같이 교리 공부를 했고, 몇 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그 내용과 구조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때 쯤, 나는 더 이상 이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문제는 더이상 앎의 문제가 아니었다. 절대자에 관해 아는 것과 절대자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4. 답
다시 한번 좌절을 맛본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돌고 돌아 성당이었다. 천주교는 내가 공부한 교리를 가장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는 곳이었다. 그렇다. 앞서 내가 만난 아무개 X는 유명 사이비 종교의 신자였다. 나는 신부에게 그들과 함께한 경험을 밝혔고, 해당 종교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부터 그의 눈빛은 혐오와 분노와 걱정으로 뒤섞였다. 나는 사이비 종교에서 습득한 지식을 타개하는 수업에 반쯤 끌려 들어갔다. 그 수업에서는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몇몇이 함께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Y는 사이비 종교의 교리를 가르치던 사람이었다. 의아했다. 교리를 가르칠 정도면 적어도 1년 이상 그 곳에서 공부를 했어야했고, 누구보다 믿음이 강한, 높은 등급의 신자였기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 곳을 빠져나올 이유가 없었다. 뚜렷한 믿음 아래에서, 그들은 대부분 행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그 곳에서 행복했는지 물었다. Y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기도와 천원으로 끼니를 때워야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음에도, 분명 행복했다고 대답했다. 더 의아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 곳에 와서 이런 수업을 듣고 있는지 물었다. Y는 믿음이 주는 안정과 그것에 기댄 자신의 행복은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후, 나는 성당에서 진행하는 캠프에 참여했고, 며칠 간,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그들의 방식에 따라 기도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신의 역사를 공부하고, 성경을 읊고, 찬송가를 부르고, 생각을 나누고, 의식을 치뤘다. 의심은 여전했지만, 감정은 이전과 달랐다. 더이상 새로운 것도, 바라는 것도, 화나는 것도 없었다. 조금은 기뻤고, 조금은 슬펐고, 조금은 멍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주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던, 그 어린 날의 충격에 사로잡혀, 절대자를 불신/부정하는 마음과 그에게 의지하고 싶은/기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분노의 근원지를 찾거나 신의 존재에 대해 진실로 알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스스로에 대한 부정과 의심을 멈추고 싶었던 것이며, 지금까지의 여정은 ‘믿음’이 나에게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나를 힘겹게 했던 감정 또한,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피어난 것이었다.
5. 현재
나는 여전히 ‘의심’하고, 여전히 ‘믿음’을 쫓으며, 여전히 ‘내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해 질문한다. 누군가는 희망을 믿고, 누군가는 운명을 믿고, 누군가는 정의를 믿고, 누군가는 자유를 믿고, 누군가는 꿈을 믿고, 누군가는 숫자를 믿고, 누군가는 관계를 믿고, 누군가는 감각을 믿고, 누군가는 기억을 믿으며 살아간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지탱하고, 집단의 문화를 형성하고, 세계의 시스템을 구축한다. 우리는 믿음 속에 살며, 믿음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없다면, 믿을 만한 것을 찾거나 믿고 싶은 것을 만든다. 그렇기에 나는 여전히, ‘우리가 지금 무엇을 믿고/의지하는지’ 관찰한다. 다시 말해, ‘이 세계가 무엇을 숭배하고, 찬양하고, 우상화하고 있는지’ 살핀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의심을 멈출 때까지 지속될, 나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자, 태도일지도 모른다.